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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가능성을 인정한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미국 증시가 2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10일 뉴욕 증시에서 나스닥지수는 전날보다 4% 급락한 1만7468.32로 마감했다. 이날 하락 폭은 인플레이션 충격이 최고조였던 2022년 9월 13일(-5.16%) 이후 가장 컸다. 다우평균(-2.08%)과 S&P500(-2.70%)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3대 지수는 모두 작년 11월 5일 트럼프 당선 이후 상승분을 반납하고 대선 이전 수준으로 하락했다. ‘트럼프 트레이드(트럼프 정책의 수혜 자산에 투자하는 것)’로 올랐던 주가 거품이 꺼지고, 이제 경기 침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주가 급락의 도화선은 전날 트럼프의 폭스뉴스 인터뷰였다. 그는 “올해 경기 침체(recession)를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과도기에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부(富)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큰일이며 이것은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답했다. 미국 경제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중국·유럽·캐나다 등을 상대로 한 관세 전쟁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그간 월가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다른 경제적 대가를 위한 협상용 카드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트럼프의 이번 발언이 그런 기대를 깨버린 것이다. 모틀리풀자산운용의 셸비 맥파딘 애널리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자신들의 정책 목표가 고통을 야기할 것이라고 인정한 첫 사례”라고 했다.

 

S&P500은 지난달 고점에 비해 8.6% 하락하면서 시가총액이 4조달러(약 5800조원) 줄어들었다. 뉴욕타임스는 “나름 탄탄한 경제를 물려받은 트럼프는 미국인들에게 부의 호황을 약속했지만 그의 공약은 취임 8주 만에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다”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의 경제 망상이 현실과 멀어져 미국을 해치고 있다”며 이를 ‘마가로메이니아(MAGAlomania)’라고 표현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과대망상증(Megalomania)’을 합성한 것이다. 미 증시 급락의 영향으로 11일 아시아 증시에서 한국 코스피(-1.28%)와 일본 닛케이평균(-0.64%), 대만 자취안지수(-1.73%)가 일제히 하락했다.

 

11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주가지수가 표시되어 있다./연합뉴스

 

◇월가, 美 성장률 속속 낮춰… 거품 빠지는 트럼프노믹스

 

이날 증시 급락은 테슬라와 엔비디아 등 대형 기술주(빅테크)가 주도했다. 경기 침체 우려로 실적 악화를 예상한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섰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15.43% 폭락하며 2020년 9월 이후 5년여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애플(-4.85%), 엔비디아(-5.07%) 등 주요 테크주 7개인 M7(매그니피슨트 7)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7740억달러(약 1129조원) 날아갔다.

 

미국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치도 낮아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미국 성장률 전망치를 2.4%에서 1.7%로 하향 조정했고, 모건스탠리는 1.9%에서 1.5%로 낮췄다.

 

경기 침체를 우려한 투자자들이 위험 자산인 주식을 팔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미 국채를 사면서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11일 오후 5시 40분 기준 연 4.195%로 전 거래일 대비 0.43% 하락했다. 경기 침체 위험이 높아지면 채권 가격은 올라가고 수익률은 내려간다.

 

그래픽=김성규

 

지난해 11월 트럼프가 당선될 때만 해도 주식시장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동안 S&P500은 약 67%, 나스닥은 142% 상승하며 주식시장이 상당한 성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자신의 1기 행정부 성과로 ‘증시 상승’을 거론했었다. 그러나 투자은행 삭소의 투자 전략가인 차루 차나나는 BBC 인터뷰에서 “최근 증시의 움직임은 트럼프가 ‘주식시장 대통령’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재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관세 강행이 금융시장 흔들어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 때만 해도 연착륙이 예고되던 미국 경제가 트럼프 당선 이후 불확실성 증가로 경기 침체에 직면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관세가 미국 노동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10%, 공화당원 중에서도 20%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반대로 미국인 10명 중 약 7명이 관세 때문에 소비하는 제품의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인플레이션이 온다면 책임은 트럼프에게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에 기대한 ‘규제 완화’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것도 불신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정부는 종이 빨대 구매 금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규제 완화의 조짐이 없다”고 비판했다. WSJ는 “오락가락하는 불확실성이 더 큰 불안감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연은)이 성장률을 실시간으로 추정하는 모델인 ‘GDP 나우’는 올해 1분기(1~3월) 미국 성장률이 -2.4%로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관세 부과가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 덮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닷컴 버블 재현?...아직은 아냐

 

최근 기술주 중심의 폭락이 지속되면서 25년 전 ‘닷컴 버블 붕괴’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WSJ는 “(닷컴 버블의 대표 종목인) 시스코시스템스가 현재의 AI 붐 대장주 엔비디아에 비견된다”며 지난해 엔비디아 시가총액은 매출의 수십 배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닷컴 버블 당시 투자자들이 맹목적 탐욕 때문에 이익도 나지 않는 인터넷 기업들에 투자한 것 같지만 당시 분위기상으로는 판단이 쉽지 않았다”면서 “지금 빅테크들은 닷컴 버블 당시 기업과 달리 수익을 내고 있어 정확히 ‘평행’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그래픽=김성규

 

다만, 미국 경제가 경기 침체에 진입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여전히 낮다고 보는 분석도 많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지난 7일 “미 경제는 견조한 성장세를 지속해왔다”며 아직은 소비 둔화나 물가 반등을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정권 초반 의도적으로 증시를 흔든 뒤 그 책임을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탓으로 전가할 유인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가 바뀔 때 취하는 ‘빅배스(부실을 한 번에 반영해 털고 가는 것)’ 전략이라는 것이다. 11일 아시아 증시가 초반 2% 안팎의 하락세로 출발했다가 낙폭을 만회한 것도 미국 경기 침체 우려가 과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출처 : 조선일보